시대전술

28 August - 28 December 2025
Overview

<시대전술>

K&L 뮤지엄 김진형 학예실장

 
동시대 우리의 삶은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의 전례 없는 발전 속에서 그 구조와 양상이 급속도로 다변화되고 있다. AI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생태의 고도화는 무한한 가능성과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며 극도의 편의성을 제공하는 한편, 인간 정체성, 존재를 흔드는 변화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취약함은 점차 선명해지고 있다. 진보된 기술문명 속에서 과정과 절차가 단축되고, 섬세한 교감이 점점 배제되며 인간과 세상 사이의 간격은 급격히 좁아졌다. 이러한 현상은 글로벌 자본주의, 불안정 노동, 사회적 고립, 관계 단절 등 개인적 삶의 불안과 우울감을 가져오면서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들을 던지게 하고 있다.
이러한 동시대 인간 삶의 모습은 폴란드 태생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이 말한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의 불확실성에 관한 개념과 연관 지어 볼 수 있다. 바우만은 현대 사회를 질서와 존엄, 안정이 해체되고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동적 상태로 보았다. 그는 특히 소외, 정체성, 소비사회, 도덕과 윤리 같은 주제를 통해 현대인이 마주한 불안정한 삶의 조건을 통찰했다. 바우만에 따르면 현대사회의 편리함과 자유의 이면에는 끊임없이 자신을 재구성 해야 하는 유동성과 불안정성이 뒤따르며, 개인은 지속적 변화 속에서 일관된 정체성을 이루기보다 일시적인 적응만을 반복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존재론적, 심리적 불안과 압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2025년 현재 우리는 이러한 흐름 속에 있다. 현대 사회의 범 분야적 발전이 삶을 향상시키는 달콤함을 가져왔지만 인간 고유의 독자성과 존재 가치를 흔드는 역설적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 
《시대전술》 전시는 이러한 동시대의 그림자를 바탕으로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변화한 “움게붕 (Umgebung,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세계)”에서 각 작가들이 고유한 감각과 인지에 따라 지각하고 다층적 이미지로 풀어낸 “움벨트 (Umwelt, 주관적 세계)”의  표상을 펼쳐 보인다. 전시에서는  유동적이고 위태로운 시대 속에서 인간 고유의 본질인 감각적 경험과 복잡다단한 감정을 풍부한 공감각적 예술로 담아낸  5명의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선보인다. ‘인간다움’의 가치와 의미를 회복하려는 시각 예술의 다양한 실천과 그 가능성에 주목하며, 동시대 예술이 던지는 메세지를  공유하고자 한다.
이제 예술가들은 더 이상 수동적으로 현실에 순응하거나 질문을 던지는 관찰자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만의 독자적 감각으로 동시대의 질서를 해석하고 스스로의 존재를 구성하며, 나아가 사회적 현실에 발언하는 하나의 ‘전술적 주체(tactical subject)’로 기능한다. 이는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가 『일상의 실천』에서 말한 ‘전술(tactics)’ 개념과도 연결해볼 수 있다. 드 세르토는 구조적 제약 속에서도 개인이 일상에서 시도하는 작지만 창의적인 실천들을 전술적 행위로 보았다. 이 전술은 고유한 영역 없이 타자의 공간에서 작동하며, 순간성과 유연성을 기반으로 한다. 바로 그 속에서 저항으로 인한 창의성이 발현된다.
김명찬은 가장 공업적이고 기계적인 회화 도구인 에어브러쉬를 사용해 회화적 표현의 비인간성을 전유하면서도, 그 표면 위에 인간 손의 미세한 떨림과 체온을 이식한다. 이는 반복과 결함, 떨림이라는 ‘인간의 흔적’을 통해 매끄러운 산업 시스템에 온기로서 균열을 만들어내는 회화적 전술이다. 유아연은 창의적인 설계로 이루어진 기계적 형태의 설치작업을 관람자가 직접 손으로 밀어 움직이게 함으로써 관객의 신체를 예술적 행위의 주체로 소환한다. 이 참여는 감상의 차원을 넘어 관람자가 자본주의 시스템에 ‘수동적 개입자’가 아닌 ‘행위자’로 전환되는 경험을 유도하며, 노동하는 신체와 자본주의를 향한 대항의 감각을 물리적으로 환기시킨다. 한편, 요한 한은 해체되고 파편화된 오늘날의 소통구조에 맞서, 신체의 움직임과 감각, 그리고 소리의 물리적 공명을 통해 소통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한다. 그의 작업은 언어 이전의 감각적 소통에 주목하며, 기술과 매체가 지배하는 질서 속에서 가장 근원적인 몸의 언어를 통해 새로운 저항과 소통을 형성하고 있다. 
신민은 일상에 내재한 불평등과 억압의 구조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사회적 약자의 분노와 소외를 조각의 형태로 구체화 한다. 성난 노동자, 여성, 청년 세대의 화가 잔뜩 난 모습을 한 그녀의 조형은 평범해 보이는 소소한 일상의 감정들을 모아 거대한 구조에 맞서는 감정의 정치학을 실천한다. 남다현은 예술이 자본주의적 가치 체계 속에서 소비되고 거래되는 방식에 유쾌하지만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다. 조각과 퍼포먼스를 통해 ‘명성’과 ‘재판매 가치’에 가려 져 잊혀진 예술의 본질을 되묻고, 유머와 가벼움 속에 위장한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그의 작업은 관람자의 웃음을 유도하면서도 그 속에 깊숙이 정곡을 찌르는 통찰로서 더욱 강한 충격과 여운을 남긴다. 
《시대전술》은 오늘의 복합적 위기 속에서 동시대 젊은 예술가들이 택한 삶의 태도와 표현의 방식을 통해,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진다. 조형, 행위, 서사, 기술 혼합 등 다양한 양상으로 펼쳐지는 이들의 움직임은, 거대한 혼돈과 위협 속에서 적응과 저항이 교차하는 생존 전략이자, 동시대를 살아내는 방식이다. 본 전시는 다섯 작가들이 현 시대의 다양한 삶의 맥락 안에서 예술적 감각으로 풀어낸 ‘조용하지만 강력한 전략’들을 살펴보고 예술이 우리의 작은 삶과 나아가 시대의 모습들을 어떻게 담아내는지를 조명하고자 한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빈 분리파의 이 선언은 오늘날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예술은 시대를 비추는 동시에, 그것을 새롭게 구성해 나가는 창조적 힘이 될 수 있다. 《시대전술》은 그 감각과 가능성을 함께 성찰한다.